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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진 관련

지속되는 공포에 ‘침착한 일본 - 초조한 일본’ 공존

ㆍ대재앙이 드러낸 맨얼굴

인적 드문 도쿄 한 일본 남성이 지난 17일 여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방사능 공포로 한산해진 도쿄 시내 거리에서 전화통화를 하면서 걷고 있다. 도쿄 | AP연합뉴스


18일 오전 일본 아오모리현 아오모리시 거리. 인근 후쿠시마현 원자력 발전소발 핵공포가 지속되고 있지만 주민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다. 출근하는 직장인들의 얼굴에서는 태연함마저 느껴졌다. 일부 대도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재기 현상도 전혀 없다. 식당에서 재난 방송이 아닌 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주민들도 보였다. 전날 저녁 아오모리역 주변의 술집들은 밤늦도록 영업했다. 웃고 떠드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종종 발견됐다.

같은날 오전 도쿄의 상업 중심지인 긴자거리는 혼란 속이다. 제한송전으로 낮 시간대지만 어둠의 거리다. 상점과 식당들의 휴업으로 인적도 줄어들었다. 편의점 앞에는 비상식량을 사두려는 시민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식료품을 사재기하는 시민들도 늘고 있다고 한다. 시민들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묻어났다. 

아오모리와 긴자 거리의 대조적 모습이 현재 일본이 처한 복합적 현실을 단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핵 공포가 지속되면서 일본의 맨 얼굴이 드러나고 있다. 평정심을 유지하던 일본인이 서서히 흔들리고 있다. 불안 심리가 반영된 사재기와 범죄 등의 무질서도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일본인의 상징인 절제와 인내심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침착한’ 일본과 ‘우왕좌왕하는’ 두 얼굴의 일본이 공존하는 모양새다.

대지진과 쓰나미, 방사성 물질 누출이라는 릴레이 재난으로 일본인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면서 당장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 특히 에너지 대란에 따라 귀해진 휘발유 절도가 기승 부리고 있다. NHK 보도에 따르면 17일 사이타마시의 미누마구 시 방재창고에서 휘발유통 8개가 털렸다. 인근 아게오시의 초·중·고교 5곳에서도 창고에 있던 휘발유와 발전기가 사라졌다. 센다이시에서는 지난 13일 주유소에서 휘발유 1ℓ를 훔친 20대 회사원이 현장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각종 범죄도 늘어나 지난 16일 도쿄에서는 주유소 앞에서 ‘새치기’ 시비가 벌어져 한 남성이 칼에 찔려 부상을 당했다. 같은날 이시노마키시에서는 문 닫은 편의점에 있는 현금자동출금기를 파손한 3명이 절도미수 혐의로 체포됐다. 질서정연했던 이와테현 오부나와다 대피소에서는 성추행까지 일어났다. 대지진 의연금 모금을 사칭하는 사기 상담전화도 늘고 있어 일본 경찰청이 단속에 나섰다.

대도시에서는 일부 품목의 사재기도 극성이다. 시민들이 비상상황을 대비해 우유, 식빵, 즉석면, 화장지, 생수를 대량 구입하고 있어서다. 이 때문에 대형슈퍼 체인의 생수, 우유 등의 주문량이 폭증하고 있다. 생필품 품귀현상이 나타나자 에다노 유키오 관방장관은 17일 기자회견에서 “법적 대응을 검토하겠다. 냉정을 유지해달라”는 강경한 방침을 발표했다.

특히 17일 오후 도쿄 시부야에서는 수십명의 시민이 모여 “간 나오토 총리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것은 상징적이다. 전대미문의 핵 위기와 일본 정부의 무능력이 겹치면서 일본인들의 자제력이 소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정신의 진화(영국 파이낸셜타임스)”라고 극찬한 일본인 특유의 질서의식과 냉정함이 붕괴된 것은 아니다. 외국인들의 ‘엑소더스’가 가속화되고 있지만 해외관광과 출장을 마친 일본인들은 속속 귀국하고 있다. 방사성 물질 누출 위기로 후쿠시마 공항에는 연일 탈출하려는 사람들도 북적거리고 있지만 새치기나 고성이 오가는 모습은 없었다. 일본인들은 마스크를 쓴 채 조용히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또한 전력대란으로 대중교통이 마비되자 일본인들은 자발적으로 자전거를 이용해 출퇴근하는 지혜를 발휘하면서 ‘자전거 타기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운행하는 전철이 절반으로 축소된 도쿄 전철역에서도 수백m의 줄을 담담히 기다리는 주민들의 질서의식이 유지되고 있다. 철저한 교통법규 준법의식 역시 흔들리지 않고 있다.

세계는 2차 대전 후 최대의 위기에 서 있는 일본의 ‘두 얼굴’을 목도하고 있다.

<도쿄 | 서의동 특파원·아오모리현 | 김기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