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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부 기사 2010.8.~

“인도주의 입국금지” 높아지는 국경장벽

“인도주의 입국금지” 높아지는 국경장벽

ㆍ그리스·이스라엘 건설 강행

아프가니스타인인 와지드 샤리피는 정치적 박해를 피해 그리스로 밀입국했다. 아프간에서 이란을 거쳐 터키와 그리스의 국경지대 에브로스강을 건너는 수천㎞를 거의 걷다보니 4년가량 걸렸다. 샤리피는 지난 5일 미국의 소리(VOA)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무척이나 힘든 여행이었다. 특히 이란에서 그리스로 갈 때는 며칠 밤을 계속 산길만 걷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인 요르단강 서안지구 내 베들레헴으로 가는 도중 마주치게 되는 장벽. 베들레헴 도심을 가로지르며 서 있다. 예루살렘 | 도재기 기자

샤리피처럼 정치적 망명이나 일자리를 찾아 유럽연합(EU) 국가들로 밀입국하는 이들의 통로 구실을 해온 그리스가 지난 3일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해 터키와의 국경에 12.5㎞ 길이의 울타리를 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불법 이민자들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 울타리가 조성되는 지역은 에브로스강 인근과 오레스티아다 마을 등이다. 당초 그리스는 터키와의 국경 206㎞ 전체에 울타리를 칠 계획이었으나 국제사회의 강한 비판에 직면하면서 계획을 축소했다.

EU 가맹국이 아닌 터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그리스는 이전부터 아프간을 비롯한 중동 국가들과 아프리카 국가 출신 난민들이 EU 국가들로 진입하는 통로 구실을 해왔다. 바다를 건너지 않고 비교적 안전하게 유럽국가로 진입할 수 있는 데다 이탈리아 등이 해상 밀입국을 엄격히 감시하고 있는 것도 밀입국자가 늘어난 원인이다. 그리스 정부는 지난해에만 약 10만명의 불법 이민자가 자국 내에 들어온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민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프간이나 이란, 소말리아, 에리트레아, 수단 등으로부터 수천㎞를 이동했다. 멀리 버마에서 밀입국하는 경우도 있다. EU 역내에서 난민지위를 받기 위해서다. 하지만 에브로스강을 건너다 익사하는 경우가 많아 이 강 일대는 ‘이민자들의 무덤’이라고 불린다. 인신매매업자들에게 납치되어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다.

멜리사 플레밍 유엔난민기구(UNHCR) 대변인은 “모든 국가는 국경을 통제할 권리가 있지만 터키를 지나 그리스를 통해 EU로 넘어오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폭력과 탄압으로부터 피신해 오는 이들”이라고 지적했다. “울타리를 설치하는 것은 이민자 문제를 푸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는 비판이다. 미셸 체르콘 EU 집행위원회 대변인도 “울타리와 장벽은 불법이민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되는 단기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리스 정부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08년과 2009년 이민자들에 대한 통합정책과 불법 이민자 지원 등에 들인 비용은 700만유로(약 101억원)에 달한다. 긴축재정을 실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손쉽게 예산을 줄일 수 있는 부분인 셈이다. 게다가 그리스 내 난민수용소는 이미 포화상태이다. 현재 그리스 내에서 망명신청대기자는 약 4만5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아프간에서 넘어온 일부 난민들은 아테네 대학 내에서 정치적 망명을 받아들여줄 것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고 있지만 그리스 당국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지난 5일 유로뉴스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입을 바늘로 꿰맨 채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단식투쟁을 벌이던 49명의 이란인 가운데 12명이 자신의 입을 꿰맨 채 1개월여의 농성 끝에 그리스 정부로부터 망명 신청을 인정받기도 했다. 그리스 인권단체들과 노조들은 오는 15일 울타리 설치 계획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지난달 초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베들레헴 시내 한 주택가 벽에 소녀가 병사를 검문하는 역설적인 내용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베들레헴 | 도재기 기자

이스라엘은 지난해 11월 이집트와의 국경지대에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해 센서, 무인 카메라 등의 감시 장비들을 갖춘 새로운 장벽 건설공사를 시작했다. 새로 설치되는 장벽의 길이는 총 240㎞에 달하며, 3억5800만달러(약 4000억원)가 투입된다. 이스라엘 정부는 난민 1만명이 머물 수 있는 수용소도 건설할 예정이다.

이스라엘 정부가 이집트 국경지대에 새 장벽을 세우게 된 것은 최근 몇 년 사이 이스라엘로 넘어온 아프리카인의 수가 폭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들의 자국 내 진입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외신은 아프리카 이민자들의 유입을 막기 위한 조치일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BBC방송에 따르면 이집트를 통해 이스라엘로 밀입국하는 아프리카인은 매주 약 700명에 달한다. 이스라엘 정부는 지난해 약 1만명이 시나이사막을 통해 자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2005년과 2006년 각각 502명, 751명이 밀입국한 것에 비하면 15~20배 폭증한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 내 아프리카 이민자들은 3만여명으로 추산된다. 이스라엘 남부의 항구도시 에일랏의 공무원인 나훔 세리는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처음에 우리는 이것(아프리카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을 인도주의적인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수였다”며 “500명이던 에일랏 내 난민은 금방 1만명으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아프리카인들이 밀입국의 종착지를 이스라엘로 바꾼 것은 북아프리카 국가들이 유럽으로 밀입국하는 통로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있는 데다 이집트도 최근 몇 년 사이에 이민자들에 대한 태도를 바꿔 탄압을 강화한 탓이다. 일시적이지만 난민들에게 거처와 일자리를 마련해준 이스라엘의 조치도 한몫했다. 에리트레아에서 강제징집을 피해 이스라엘로 밀입국한 마레나 톨데 브라한(28)은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거리를 헤매고 있다. 그는 AFP통신에 “이스라엘과 유엔은 우리들에게 해결책을 줘야 한다”고 호소했다.

더욱이 시나이사막을 건너 이스라엘로 가는 길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갖가지 위험에 노출돼 있다. 이집트 국경수비대와 베두인족에게 목숨을 빼앗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에 따르면 지난 2일 이집트 국경수비대가 시나이반도에서 불법으로 월경을 시도하던 아프리카 이민자에게 총격을 가해 30명이 사망했다.

BBC방송을 비롯한 외신에 따르면 2007년에는 85명이 이집트 국경수비대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민자를 납치해 살해하는 사건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특히 베두인족은 몸값 4000~8000달러를 받고 이스라엘에 보내기도 한다. 지난달에는 250명의 에리트레아인이 밀입국 중 납치, 감금됐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