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3일 왕십리cgv
지브리 스튜디오의 신작 '마루 밑 아리에티'를 봤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각본을 맡았고, 요네바야시 히로마사라는 사람이 연출을 맡았는데 네이버에서 검색해 본 거로는 73년생 젊은 감독이라는 것 외의 정보는 찾지 못했습니다.
영화 내용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제목만으로도 마루 밑에 사는 소인 아리에티와 인간 누군가와의 관계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을 아실 수 있을 테니까요. 꼭 보셔야 할 정도라고까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강추할 만한 작품인 건 사실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그보다는 제목에 쓴 대로 빌려 생활하는 것에 대해 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한국 제목 '마루 밑 아리에티'의 일본 원제는 '借りぐらしのアリエッティ'로 빌려 생활하는 아리에티라는 뜻이에요. 영어 제목인 'The Borrowers'를 보시면 이해가 더 잘 되리라 생각합니다. 왜 아리에티를 비롯한 소인들이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카리구라시라고 하냐면 인간들로부터 필요한 생필품을 몰래 빌려서 생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꼭 필요한 것만 빌려서 생활하는 것과 훔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제가 이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주목해서 본 부분이 바로 이 '빌려 생활한다는 것'이에요. 항상 그렇지만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주제로 삼을 때가 많은데 '마루 밑 아리에티'에서도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빌려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빗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영화 속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인간들 자신도 자연으로부터 온갖 자원을 빌려쓰는 주제에 소인들이 인간의 물건을 빌려쓰는 걸 도둑이라느니 하며 비하한다는 건 좀 웃기는 일이겠지요.
저는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영화의 등장인물인 병약한 소년 쇼와 소인 소녀 아리에티의 대화 중에 멸망해 가는 소인들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쇼의 약간 느끼하게 보이면서도 또 초탈한 것처럼 보이는 표정은 바로 일본을 포함해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나라들의 지식인들이 매일 살육당하고, 학대당하는 제3세계 국가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불쌍하다, 안 됐다, 그들의 인권 진작을 위해 도와주자라고 생각하고 일부 실천도 하지만 결국 대부분 이들에게는 남의 일일 뿐이죠. 멸망해가는 소인들에 대한 쇼의 처음 태도와 비슷하지 않나요. 그리고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라고 외치는 아리에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제3세계에 속한 인류의 존엄한 모습을 빗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의 억측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모두가 빌려 생활하는 것인데 재산 증식에 애를 쓰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영화를 보시면 충분히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이해하시겠지만, 제목이 그냥 '마루 밑 아리에티'로 나간 건 좀 아쉬운 부분이에요. '빌려 생활하는 아리에티'라는 게 우리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요.
이 애니메이션 제목의 문제와는 좀 다르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역시 우리말로 옮기기 어려운 일본 어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방불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경우인 듯 싶어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일본 제목은 '千と千尋の神隱し'에요. '千と千尋の行方不明'이 아니고요. '神隱し', 즉 카미가쿠시는 일본의 민담이나 전설에서 신들이 아이나 처녀를 납치해서 숨겨놓는 경우에만 사용하는 말이에요. 일반적인 행방불명과 동의어가 아니지만, 한국 제목을 지으신 분들께선 카미가쿠시를 번역하는 걸 포기하실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른 지브리 애니메이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마루 밑 아리에티'의 쇼는 지금까지 나온 지브리 애니의 남자주인공들 중에 가장 느끼하지 않았나 싶어요.^^; 전 '쟤가 대체 왜 저런 표정과 목소리로 말하는 걸까'라고 여러번 생각했거든요. 그에 비해 아리에티는 지브리 애니 주인공답게 팔짝팔짝, 후다다닥 잘도 뛰어다니는 모습이 무척이나 쾌활해 보이는 건강한 캐릭터입니다.
지브리 애니에 꼭 나오는 장면이 주인공들이 후다다닥 뛰어가는 모습인데 전 참 이 장면들이 좋더라고요. 코난과 포비, 나우시카, 라퓨타의 파즈, 토토로의 사츠키 등 건강한 캐릭터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 제 마음도 유쾌해지는 듯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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