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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부 기사 2010.8.~

칠레의 또 다른 9·11, 여기에도 미국의 그림자

미국 뉴욕의 9·11테러 참사현장에서 9주년 기념식이 열린 지난 11일 칠레에서는 또 다른 9·11을 기념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12일 AFP통신에 따르면 지난 11일에서 12일 사이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는 시민 수천명이 피노체트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쿠데타 37년을 기념하는 이 시위에서 시위대 13명과 경찰 9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 시위대 251명이 경찰에 체포됐다.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는 매년 9·11일 마다 공산당과 인권단체 등의 주도로 1973년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부가 일으켰던 쿠데타에 반대하고, 이날 사망한 살바도르 아옌데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칠레에서 9·11은 17년 동안의 피노체트 철권 통치가 시작된 날인 동시에 아메리카대륙에서 선거로 당선된 첫 사회주의 정권의 대통령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가 살해된 날이다.

내과 의사 출신인 아옌데는 1970년 9월4일 민중연합의 후보로 나선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진영의 후보 단일화 덕에 승리했다.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한 것이다.

미국을 등에 업은 기득권층의 부패로 계층 간 갈등과 빈부격차가 극에 달해 있던 칠레에서 민족주의가 가미된 공산주의 성향의 아옌데 정권은 빈부격차 해소를 위해 사회주의 정책을 잇따라 내놓았다.

그러나 칠레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던 미국은 남아메리카에 좌파 정권이 들어서있는 것을 오래 두고 보지는 않았다.

1973년 3월 경제 정책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더 높은 득표율로 아옌데가 당선되자 미국이 뒤를 봐주고 있던 칠레 군부는 1973년 9월11일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통령궁을 공격했다.

끝까지 저항하던 아옌데는 이날 쿠바를 방문해 카스트로를 만났을 때 선물받은 AK소총으로 자살했고, 이때부터 군부를 이끈 아우구스트 피노체트의 독재가 시작됐다.

아옌데의 죽음에 대해서는 군부의 살해 의혹이 수십 년 동안 제기돼 왔으나 아옌데의 가족과 대통령궁 진료소 의사들의 증언으로 인해 자살을 택한 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피노체트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미국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미국이 쿠데타를 직접 실행한 것은 아니지만,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는 최고의 전제 조건들을 창출하였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아옌데는 죽기 전 군부가 아직 장악하지 않은 라디오방송을 통해 칠레 국민들에게 한 연설에서 “반역자들이 세상을 지배하려고 하는 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기어코 이겨내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다시 큰 길이 열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쿠데타 이후 칠레인들은 1990년까지 17년 동안 독재 정권에 시달렸다. 피노체트가 집권하는 동안 3197명이 살해됐고, 1197명이 실종됐다. 고문 피해자는 수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들 대부분은 칠레 공산당과 사회당 등의 좌파정당의 인사들과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조직의 회원 및 동조자, 아옌데 정권 당시 공직자 등이다.

피노체트 정권하에서 자행된 범죄들로 인해 독재가 끝난 후 군과 경찰 인사 560명이 기소당했지만 정작 피노체트 본인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1991년 권좌를 물러난 피노체트는 1998년 런던에서 요양 중 체포됐으나 건강을 이유로 2000년 석방돼 칠레로 귀국했다. 칠레 정부는 피노체트를 가택 연금한 후 300여건의 범죄 혐의로 기소했다.

그러나 피노체트는 지난 2006년 말 91세를 일기로 갑자기 사망했고, 결국 아무런 사법적 처벌도 받지 않았다.

현재 칠레는 칠레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사회당의 미첼 바첼렛이 집권 중이다. 1990년 선거로 민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지난 2000년에는 사회당의 리카르도 라고스 에스코바르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30년 만에 다시 사회주의 정권이 출범했다.

한편 AFP통신은 11일 산티아고 한쪽에서는 전역한 군 인사들이 독재자의 딸 루시아와 함께 피노체트 시대를 기리는 기념식을 열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