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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국제기사

[주간경향]아직 끝나지 않은 비극 ‘킬링필드’

[세계]아직 끝나지 않은 비극 ‘킬링필드’
2011 12/20주간경향 955호
ㆍ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전범재판 ‘용두사미’ 가능성 높아져

“크메르루주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캄보디아인들을 죽인 것은 베트남인들이다.” “학살은 꾸며낸 이야기다.” “죽은 이들은 반역자이거나 적들이었다.”

현재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크메르루주 국제전범재판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건번호 002’ 크메르루주 핵심인사들에 대한 재판에서 피고들이 쏟아내고 있는 변명들이다. 현재 재판소에서는 키우 삼판 전 국가주석(80)을 비롯해 2인자인 누온 체아 전 공산당 부서기장(84), 3인자인 렝 사리 전 외교부 장관(85), 렝 사리의 아내인 렝 티리트 전 사회부 장관(79) 등 크메르루주 핵심인사 4인에 대한 역사적인 재판이 진행 중이다. 유엔이 후원하는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소는 2006년 설립됐으며 2007년 누온 체아 등 4명을 체포해 반인도적 범죄, 전쟁범죄, 고문 등의 혐의로 지난해 기소한 상태다.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정권의 2인자였던 누온 체아 전 공산당 부서기장(가운데)이 5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교외의 크메르루주 국제전범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담당판사, 수사대상자 혐의 축소 의혹
피고인들은 혐의를 부인하며 베트남에 학살의 책임을 돌리고 있지만 이미 드러나 있는 물증이 확실하기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나치에 대한 단죄 이후 가장 역사적인 전범재판으로 불리는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에 대해 용두사미가 되는 것이 아닌지 갈수록 우려의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6월 전범재판소에서는 수사판사들이 수사대상들의 혐의를 덮어주려 했다는 의혹이 터져나왔다. 공동 수사판사를 맡고 있는 독일인 판사 지크프리트 블룽크와 캄보디아 판사인 요우 분렝이 대량학살 등 반인륜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5명의 새 용의자들에 대해 조사하면서 이들을 소환해 조사하거나 핵심 증인들을 만나지도 않고 조사를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검사 측에서 블룽크 판사가 사건을 묻으려 한다고 폭로하면서 판사 측이 자신을 비난한 검사를 법정모독죄로 다스릴 수도 있다고 밝히는 등 갈등이 빚어졌다. 공동 수사판사실의 직원들도 이에 항의하며 사표를 내기도 했다. 당시 조사 대상은 사건번호 003과 004의 대상이 될 크메르루주 해군사령관, 공군사령관 등으로 알려져 있다.

블룽크 판사는 결국 지난 10월 사임했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캄보디아 판사인 요우 분렝은 자국 정치인들의 압박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유엔 관리인 블룽크가 왜 이 같은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고 전했다. 특히 유엔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재판을 끝내지 못하게 되는 것을 우려해 블룽크에게 이 같은 일을 벌이도록 한 것이 아닌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이다.

전범재판소에 대해 오랫동안 모니터링해온 시민단체 열린사회정의이니셔티브는 11월 말 유엔에 판사들의 직권남용과 캄보디아 정부의 방해에 대해 조사할 독립적인 기구를 설치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상태다.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전범재판소 활동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캄보디아 전범재판소에서 벌어진 직권남용에 대해 독립적이고 신뢰할 수 있으며 투명한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다수의 한계점이 지적돼 왔다. 재판이 크메르루주 정권이 몰락한 지 17년 6개월 만인 2006년에야 시작된 것은 가장 큰 한계다. 재판대에 오른 4인 크메르루주 지도부의 나이는 79~85세의 고령으로 재판이 끝나기 전 사망할 가능성도 있다. 렝 티리트는 치매까지 걸린 상태다.

투올슬렝 수용소(일명 S-21) 소장이었던 캉켁이우(사건번호 001)만이 이미 3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폴 포트는 이미 1998년 72세를 일기로 단죄를 받지 않은 채 사망했으며, 투올슬렝 수용소에서 1만7000명을 학살해 ‘도살자’로 불리던 타 목 역시 2006년 프놈펜의 한 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재판소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핵심인사 4인에 대한 재판을 혐의에 따라 구분해 진행하고 있으며, 지난 5일부터는 강제이주와 반인도적 범죄 관련 혐의만을 다루는 재판이 열리고 있다.

크메르루주 출신 정부인사 재판 비협조
재판 대상이 핵심인사들 몇몇에만 국한된 것도 문제다. 여전히 크메르루주 출신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탓에 캄보디아 정부는 재판 범위를 더 이상 넓히지 않으려 하고 있다. 훈센 캄보디아 총리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범재판 외의 전범재판을 실시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으며, 진실 규명에 협조하지 않고 있다.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정권의 학살극 ‘킬링필드’ 당시 희생된 이들 중 약 8000명의 유골이 보관돼 있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교외의 사리탑에서 8일 관광객들이 참배를 하고 있다.



훈센은 지난해 10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만나 더 이상의 전범재판은 캄보디아의 안정을 위해 허용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캄보디아 정부의 인권침해를 비판해온 주 캄보디아 유엔 인권기구 대표를 해임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훈센은 크메르루주 정권 당시 군의 연대장 출신이며 고위 관료를 비롯해 캄보디아 군부와 경찰 곳곳에는 크메르루주 출신이거나 관련이 깊은 인사들이 자리잡고 있다.

흔히 킬링필드로 알려져 있는 크메르루주 정권의 학살 이전 미국이 저지른 또 하나의 킬링필드에 대해서는 전혀 단죄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도 캄보디아 전범재판의 한계다. 미국은 1969~73년 사이 캄보디아가 베트남 공산당을 지원한다며 캄보디아를 맹폭했다. 당시 60만~80만명가량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크메르루주의 핵심인사들뿐 아니라 헨리 키신저 당시 미 안보담당 보좌관 등 미국 관리들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훈센 총리가 2006년 전범재판소 출범 이후 계속해서 재판을 지연시켜올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의 이런 약점을 방패로 내세워서 가능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킬링필드란?
1975년 폴 포트(1925~98)가 이끄는 크메르루주는 미국의 비호를 받던 논 놀 장군의 우파 군사정권을 몰아낸 후 3년 9개월간 집권하면서 살인, 고문, 강제노동 등 반인륜적 범죄를 자행했다.
프랑스에서 마오쩌둥의 사상에 심취했던 폴 포트는 집권 후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 가족을 해체하고 교육·화폐·종교를 없애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 과정에서 반대하는 수많은 지식인과 민간인을 학살했고 희생자는 당시 인구의 4분의 1인 17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폴 포트 정권은 1978년 12월 베트남의 침공으로 실각했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