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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국제기사

[세계]버마야? 미얀마야?

주간경향 985호

[세계]버마야? 미얀마야?



버마의 야당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 여사(분홍색 옷)가 7월 12일 정기국회에 참석했다. | AP연합뉴스



“버마? 버마가 어디죠? 아, 미얀마. 버마에서 미얀마로 이름 바꾼 지 오래 되지 않았나요?”

버마라는 국명을 들었을 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버마 군사정권이 버마라는 국명을 미얀마로 바꾼 지 23년이 지났고, 국내 대부분 언론들은 버마 대신 미얀마라는 국명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잊혀진 이름이었던 버마가 다시 국내외 언론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은 최근 버마에서 군부를 기반으로 삼고 있는 정부와 최대 야당인 민족민주동맹(NLD)의 대표인 아웅산 수치 여사가 국명을 두고 날선 대립을 벌였기 때문이다.

버마 정부는 6월 29일 성명을 통해 수치 여사가 유럽 순방 중 버마라는 옛 이름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며 수치 여사와 민족민주동맹에 버마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한 바 있다. 버마 정부는 수치 여사가 태국과 유럽 5개국을 방문해 버마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국가의 이름을 미얀마라고 규정한 헌법을 어기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수치 여사는 1991년 수상이 결정되었던 노벨평화상을 6월 16일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에서 21년 만에 받으면서 한 연설에서나 다른 나라들을 방문해서나 미얀마 대신 버마라는 국명을 사용했다. 이것이 버마 정부를 자극한 것이다.

그러나 수치 여사는 지난 7월 3일 옛 수도 양곤에서 기자들과 만나 정부의 요구를 일축했다. 그는 “나는 내 나라를 옛날 이름 그대로 버마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는 누군가를 모욕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나는 민주주의 하에서는 내가 부르고 싶은 대로 (국명을) 부를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수치 여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어떤 일이든 국민의 요구대로 실행되어야 하는데 군부는 여론 수렴 없이 나라의 이름을 바꿔버렸다”고 덧붙였다.

민주화 세력이 미얀마라는 명칭 거부
버마라는 국명이 미얀마로 바뀐 것은 1989년부터로 현재 미얀마의 공식 명칭은 미얀마 연방(영어명 The Union of Myanmar)이다. 군부는 1988년 8월 8일 이른바 ‘8888 항쟁’이라고 불리는 버마인들의 대규모 시위를 유혈 진압했고, 이듬해 6월 18일 버마라는 이름은 영국 식민시대를 떠올리는 이름이라며 식민 잔재를 없애고 버마족 외의 다른 민족을 포괄하는 국가를 건설하겠다며 국명을 미얀마로 바꿨다. 옛 수도인 랭군의 이름도 양곤으로 바꾼 바 있다. 포린폴리시는 당시 국명과 수도 이름 등을 바꾸기 위해 만들어진 위원회의 위원 21명 가운데 4명만이 학자들이었고 나머지는 군인들과 관료들이었다고 전했다. 다음해인 1990년 총선에서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이 압승을 거뒀지만 군부는 정권 이양을 거부했고 지난해 민선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버마를 통치해 왔다.

사실 군부가 미얀마라는 이름을 임의로 국가 명칭으로 사용하기 전까지 버마와 미얀마는 현지인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는 용어였다. 보통 구어에서, 즉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버마로, 문어에서는 미얀마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치 여사와 민족민주동맹을 비롯한 민주화세력이 미얀마라는 이름을 거부하는 것도 용어 자체보다는 군부가 정당성 없이 붙인 이름을 거부하겠다는 뜻에서다.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유엔과 동남아시아국가연합 소속의 국가들은 바뀐 국명을 인정했지만 미국은 미얀마라는 국명 사용을 거부했고, 유엔은 ‘버마/미얀마’라는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국내언론은 미얀마, 경향신문은 버마
경향신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내 언론들은 미얀마라는 국명을 사용하고 있지만 해외 언론들 가운데에는 버마라는 국명을 고수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또 버마의 민주화세력을 지원하거나 지지하는 비정부기구 및 활동가들도 미얀마 대신 버마라는 국명을 사용하고 있다. 태국으로 망명한 버마 민주화운동가들이 만든 독립언론 ‘이라와디’는 물론 버마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해외 언론사들의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확인한 결과 BBC방송, 가디언, 인디펜던트 등 영국 언론들은 영국이 버마를 식민지배했던 당시의 명칭 그대로 버마라는 국명을 사용하고 있다. 또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과 미국 워싱턴포스트도 미얀마 대신 버마라는 국명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CNN방송, 뉴욕타임스, 공영방송 NPR 등은 미얀마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버마라고도 불리는’이라는 표기를 병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국 다음으로 버마를 식민지배했던 일본의 언론들은 미얀마라는 국명을 사용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2일, 아웅산 수치 여사와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버마 양곤에 있는 수치 여사의 자택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 AP연합뉴스


사실 경향신문이 2007년 9월부터 미얀마라는 국명 대신 버마라는 국명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군사독재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크다. 당시 경향신문은 “버마 군사정권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유혈진압한 사태를 계기”로 “군사독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버마로 부르기로 했습니다”라고 밝혔다. 경향신문은 “다수의 버마인, 버마 망명자,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시민단체, 세계의 유수의 언론은 이미 미얀마가 아닌 버마로 표기하고 있습니다”라며 “시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군사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승려들이 주도해 샤프론혁명으로 불린 대규모 시위 당시에도 군부는 민주화 요구를 총칼로 무참히 탄압했다.

그러나 유엔이 1989년 바로 미얀마라는 국명을 공식 인정한 상태인 데다 지난 4월 버마 총선 보궐선거가 큰 잡음 없이 비교적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러진 이상 버마라는 호칭을 계속 사용해야 하는가라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당시 세계 각국의 선거 관련 공무원들과 언론인 수백명이 선거를 참관했으며 선거 결과 버마 민주화운동의 상징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의회에 진출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경향신문도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선거에 참관해 현지 소식을 국내에 보도한 바 있다.

영국언론은 버마, 미국언론은 미얀마
현재 버마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국가나 언론들 역시 이 같은 질문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 3일 미국, 영국, 캐나다, 프랑스 등 버마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나라들이 이를 재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 국무부는 미얀마라는 국명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태로 국무부 관리들은 공식 석상에서 미얀마라는 명칭을 입에 올리지 않고 있다. 미 국무부는 “1990년에 민주적으로 선출되고도 활동하지 못한 의회는 군부의 국명 변경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민주적 야당도 버마라는 명칭을 계속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지난 4월 1일 버마 총선 보궐선거를 계기로 진행했던 좌담회에 참석한 국내 전문가들은 경향신문이 버마 대신 미얀마라는 국명을 사용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보였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박은홍 교수는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지난해 12월 방문했을 때도 어떤 국호를 써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클린턴은 이 땅, 이 나라라고 불렀다”며 “미얀마로 바꿔 부르는 게 아직은 성급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기범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holjja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