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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부 기사 2010.5.~

“말은 안 통해도 서로 보듬다 보니 친구”

ㆍ한·일 대안학교 아이들의 만남
ㆍ학교에서 받은 상처 함께 어울리며 씻어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은 8시로 할까요? 9시로 할까요?” “곡성 5일장을 구경할까요. 레일 바이크를 타는 것이 좋을까요?”

지난 27일 밤 전남 곡성군 적곡면 남양리의 한 농가. 인적이 드문 산골마을에서 한국과 일본 아이들이 내일 일정을 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어른들도 끼어있었지만 각자의 언어로 얘기하는 것을 통역해줄 뿐 회의는 아이들이 진행했다. 학교에 다니기 힘들었던 두 나라 아이들의 특별한 만남이었다.

보따리학교 한·일 공동캠프에 참가한 한국과 일본의 어린이들이 29일 오전 전남 곡성군 적곡면 산골마을의 한 농가에서 서로의 웃는 얼굴을 도화지에 그리고 있다. | 김기범 기자


곡성 산골마을에서 열린 2박3일의 교육캠프에 한국에서는 ‘보따리학교’ 학생들이 참가했다. 학교건물·교사·입시 과정을 모두 거부하고 학습 내용·장소·기간도 인터넷에 공지, 원하는 학생들이 참가하는 이른바 ‘길 위의 대안학교’ 모임이었다. 이번 보따리학교에 모인 아이들도 상당수 학교를 자의나 타의로 그만뒀다.

일본에서 온 아이들도 비슷한 시련과 고민을 안고 있었다. 학교에서 받은 상처로 인해 등교를 거부하다가 일본에서 탈학교 어린이들을 돌보는 기관인 ‘프리스페이스 코스모’에 다니게 된 아이들이다. 

학교에서 또래들의 언어폭력이나 괴롭힘에 시달린 상처가 있거나, 학교를 다니길 원하지만 아이의 자유로운 행동방식을 용납하지 못하는 학교에서 거부된 경우도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고, 만난 지 하루 이틀밖에 안됐지만 두 나라 아이들 10여명은 원래 알던 친구처럼 거리낌없이 지냈다. 한국어와 일본어로 별명을 지어주며 친근감을 표시했고, 일본에서 온 미슈양(8)이 물건을 잃어버려 울 때는 다 함께 걱정하며 안타까워했다. 

안동에서 보따리학교에 참가한 권모양(15)은 “말은 안 통했지만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며 “언어 차이 말고는 서로 다르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기도 안 들어오고 재래식 화장실을 쓰는 농가였지만 아이들은 어떤 불만도 없었다.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지역 주민들과 만나거나 계곡 물놀이, 곡성 5일장 견학, 기념물 만들기, 공동체 놀이…. 여러 프로그램이 이어졌지만 날씨 변수를 빼면 다음에 무엇을 할지 정하는 것은 내내 그들이었다.

일본과 한국의 탈학교 청소년들이 보따리학교에서 만나게 된 것은 지난 3월 보따리학교 학생들이 일본의 코스모를 찾았던 게 계기가 됐다. 

탈학교 청소년끼리 말도 안 통하면서 적극적으로 어울리며 서로 좋은 인상과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일본 아이들도 이때부터 한국 친구들을 만나러 가자고 스스로 결정, 모금운동을 하거나 벼룩시장에서 팥빙수를 팔면서 한국에 갈 경비를 마련했다. 서로의 상처와 외로움을 보듬는 친구가 된 것이다. 

아이들은 헤어지게 된 29일 아침밥을 먹기 전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밑에 가서 각자 소원을 빌었다. 

일본에서 온 가오루양(16)은 “일본에 돌아가기 싫을 정도로 좋았다”며 “나무 밑에서 한국 친구들과 또 만나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받은 상처를 벗고 건강하게 재회하자고 다짐하는 저마다의 뜻깊은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