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집밖으로 나온 수치 ‘버마의 빛’ 밝힐까
버마 민주화운동의 상징 아웅산 수치 여사가 가택연금 기한이 만료된 10월 13일 7년 만에 버마 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버마 안팎에서 변화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수치 여사가 군부와 대화를 하겠다고 밝히면서도, 비타협적으로 민주화운동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한 것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군부가 원하는 경제 제재 완화를 안겨주는 대신 ‘약간의 민주화’를 얻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수치 여사는 연금 해제 다음날인 지난 14일 버마의 옛 수도 양곤의 민족민주동맹(NLD) 당사에서 지지자 1만여명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라며 앞으로도 활발히 활동할 것임을 선언했다. 그는 “모든 민주주의 세력과 함께 하겠다”며 야권의 단합을 주문했고, 동시에 “군부와도 기꺼이 대화를 하겠다”고 말했다. 가장 관심을 끄는 부분은 수치 여사가 서방 국가들이 군부를 고립시킬 목적으로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는 것에 대해 지지하던 종전 입장과는 달리 민생을 위해 경제 제재 완화나 해제를 요청할 뜻이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수치 여사는 14일 연설에서 “버마 국민들이 원한다면 경제 제재 해제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14일 “대화를 통해 군부와 새로 관계를 정립할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 지나치게 대립적으로 간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분열된 야권 단합 새 계기로
야당들이 일제히 환영의 뜻을 표하며 수치와 협력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지리멸렬하게 분열된 상태로 최근 총선에서 참패했던 야권이 힘을 합칠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수치 여사와 NLD의 총선 불참에 반대하며 지난 7일 실시된 총선에 따로 당을 꾸려 참가했던 민족민주세력당(NDF)은 연금 해제 당일 바로 수치와 함께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NDF 총재 킨 마웅 슈웨는 13일 “그(수치)가 원한다면 우리는 그(수치)를 만날 준비가 되어있다”며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그와 함께 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밖에 ‘88세대학생청년’과 소수민족들에 기반을 둔 정당들도 수치 여사와 협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버마 독립언론 이라와디에 따르면 수치 여사는 지난 21년 중 15년 간을 집 안에만 갇혀 있었으면서도 대부분의 버마인들에게 여전히 민주화의 유일한 희망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수치 여사를 실제로 본 적이 없는 20대들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다.
군부도 일견 전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버마 관영신문 ‘미얀마의 새 빛’은 “(정부는) 수치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도와줄 준비가 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일부 병사들이 수치 여사를 지지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17일 BBC방송에 따르면 2개 보병사단의 병사 수백명과 그들의 가족이 수치 여사를 만나기 위해 연금 해제 당일인 13일 양곤을 찾았다. 이 병사들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수치 여사가 상관들과 대화를 통해 물자 부족 문제 등을 해결해 줄 것으로 믿고 있다”고 말했다.
버마 민주화 중추 ‘88세대’ 주목
그러나 일련의 장밋빛 전망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군부가 이제까지 수치 여사를 풀어줬다가 다시 연금 조치를 반복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연금 해제 역시 다시 잡아가두기 전의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분석이다. 버마 정책 전문가인 아시아소사이어티 연구 책임자 수잔 디마지오는 17일 미국 일간 보스턴글로브 기고문에서 “미국이 버마 군부와 대화를 할 경우 군부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감시할 필요가 있다”며 “군부가 경제 제재가 완화된 뒤 다시 수치 여사를 잡아가둘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비록 부정부패로 얼룩진 총선을 통한 것이기는 하지만 군부가 합법적인 의회와 행정부를 손에 넣게 된 상황에서 실제 정치 경력은 얼마 되지 않는 수치 여사와 세가 미약한 야당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또 군부가 총선에 대해 비판하는 행위를 처벌하겠다고 밝힌 것도 수치 여사의 행보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다. 17일 AP통신에 따르면 버마 정부는 16일 총선의 공정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 징역이나 벌금형을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수치 여사와 함께 이 같은 고난을 이겨내고 버마의 민주화를 이뤄갈 세력으로 이른바 ‘88세대’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88세대는 1988년 8월 8일을 전후로 버마에서 독재자 네윈에 대한 저항으로 벌어졌던 대규모 민주화시위를 뜻하는 ‘8888혁명’을 겪은 세대를 말한다. 1960년대 중후반에 태어나 현재 40대 초중반인 88세대에는 현재 버마에 수감 중인 민주화운동가 민꼬나잉과 닐라 테인, 코 지미 등이 포함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현재 정치범으로 수감 중이거나 일본, 한국, 유럽 등으로 망명했다. 언론인이나 저술가로 활동하는 경우도 많다. 전문가들은 2007년 학생과 승려들이 무려 19년 만에 버마 옛 수도 양곤 등에서 벌인 대규모 시위 역시 이들 88세대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88세대학생청년’이라는 이름으로 이번 총선에서도 후보를 낸 바 있다. 버마 전문가인 버틸 린트너는 저서 <아웅산 수찌와 버마 군부>에서 “88세대는 세대 집단이지 한꺼번에 탄압할 수 있는 정당이 아니기 때문”에 수치 여사를 잡아가둔 것처럼 일부 지도자를 가둬둔다고 해서 무력화시킬 수 없다고 설명했다. 린트너는 또 “88세대는 확실한 지도부나 조직은 없지만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면서도 “가까운 미래에 그들이 본격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기는 어렵다”는 다소 어두운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한편 인도, 중국 등 버마 주변국들과 미국 등이 버마 민주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국 내에서는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이 적극적으로 버마 군부와 대화를 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오고 있다. 16일 미국 일간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사설을 통해 “미국은 버마가 중국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하기보다는 아시아의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마에서 군부 독재가 시작된 1962년부터 군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은 수치 여사의 연금 해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며 버마가 현재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다. 인도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수치 여사의 가택연금 해제에 대해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자국의 이익을 위해 버마 군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수치 여사는 14일 연설에서 “‘실현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겠습니다’라고 간단하게 약속하는 것으로는 국민들을 한데 합칠 수 없습니다”라며 버마 민주화의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주변국들의 천연자원을 노린 버마 군부에 대한 구애와 버마 군부의 경제 제재 완화에 대한 바람, 그리고 88세대와 시민들의 기대 속에서 수치 여사가 버마 내부에서 얼마만큼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기범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holjjak@kyunghyang.com>
ㆍ7년 만에 가택연금 풀리면서 군부와 새로운 관계 가능성 시사
“용기를 잃지 맙시다. 국민이 참가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제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을 평화적이고 정당한 방법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용기를 잃지 맙시다. 국민이 참가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제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을 평화적이고 정당한 방법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아웅산 수치 여사(가운데)가 11월15일 버마 양곤 민족민주동맹(NLD) 당사를 떠나며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양곤/AP연합뉴스 |
버마 민주화운동의 상징 아웅산 수치 여사가 가택연금 기한이 만료된 10월 13일 7년 만에 버마 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버마 안팎에서 변화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수치 여사가 군부와 대화를 하겠다고 밝히면서도, 비타협적으로 민주화운동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한 것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군부가 원하는 경제 제재 완화를 안겨주는 대신 ‘약간의 민주화’를 얻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수치 여사는 연금 해제 다음날인 지난 14일 버마의 옛 수도 양곤의 민족민주동맹(NLD) 당사에서 지지자 1만여명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라며 앞으로도 활발히 활동할 것임을 선언했다. 그는 “모든 민주주의 세력과 함께 하겠다”며 야권의 단합을 주문했고, 동시에 “군부와도 기꺼이 대화를 하겠다”고 말했다. 가장 관심을 끄는 부분은 수치 여사가 서방 국가들이 군부를 고립시킬 목적으로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는 것에 대해 지지하던 종전 입장과는 달리 민생을 위해 경제 제재 완화나 해제를 요청할 뜻이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수치 여사는 14일 연설에서 “버마 국민들이 원한다면 경제 제재 해제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14일 “대화를 통해 군부와 새로 관계를 정립할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 지나치게 대립적으로 간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분열된 야권 단합 새 계기로
야당들이 일제히 환영의 뜻을 표하며 수치와 협력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지리멸렬하게 분열된 상태로 최근 총선에서 참패했던 야권이 힘을 합칠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수치 여사와 NLD의 총선 불참에 반대하며 지난 7일 실시된 총선에 따로 당을 꾸려 참가했던 민족민주세력당(NDF)은 연금 해제 당일 바로 수치와 함께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NDF 총재 킨 마웅 슈웨는 13일 “그(수치)가 원한다면 우리는 그(수치)를 만날 준비가 되어있다”며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그와 함께 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밖에 ‘88세대학생청년’과 소수민족들에 기반을 둔 정당들도 수치 여사와 협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버마 독립언론 이라와디에 따르면 수치 여사는 지난 21년 중 15년 간을 집 안에만 갇혀 있었으면서도 대부분의 버마인들에게 여전히 민주화의 유일한 희망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수치 여사를 실제로 본 적이 없는 20대들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다.
군부도 일견 전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버마 관영신문 ‘미얀마의 새 빛’은 “(정부는) 수치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도와줄 준비가 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일부 병사들이 수치 여사를 지지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17일 BBC방송에 따르면 2개 보병사단의 병사 수백명과 그들의 가족이 수치 여사를 만나기 위해 연금 해제 당일인 13일 양곤을 찾았다. 이 병사들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수치 여사가 상관들과 대화를 통해 물자 부족 문제 등을 해결해 줄 것으로 믿고 있다”고 말했다.
버마 민주화 중추 ‘88세대’ 주목
그러나 일련의 장밋빛 전망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군부가 이제까지 수치 여사를 풀어줬다가 다시 연금 조치를 반복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연금 해제 역시 다시 잡아가두기 전의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분석이다. 버마 정책 전문가인 아시아소사이어티 연구 책임자 수잔 디마지오는 17일 미국 일간 보스턴글로브 기고문에서 “미국이 버마 군부와 대화를 할 경우 군부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감시할 필요가 있다”며 “군부가 경제 제재가 완화된 뒤 다시 수치 여사를 잡아가둘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비록 부정부패로 얼룩진 총선을 통한 것이기는 하지만 군부가 합법적인 의회와 행정부를 손에 넣게 된 상황에서 실제 정치 경력은 얼마 되지 않는 수치 여사와 세가 미약한 야당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또 군부가 총선에 대해 비판하는 행위를 처벌하겠다고 밝힌 것도 수치 여사의 행보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다. 17일 AP통신에 따르면 버마 정부는 16일 총선의 공정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 징역이나 벌금형을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버마의 전 학생운동단체인 88세대학생청년 회원들이 지난 8월 8일 불교 승려들과 함께 양곤 교외의 한 불교 사원에서 1988년 8월 8일의 8888혁명을 기리는 종교 의식을 갖고 있다. 양곤/AP연합뉴스 |
전문가들은 수치 여사와 함께 이 같은 고난을 이겨내고 버마의 민주화를 이뤄갈 세력으로 이른바 ‘88세대’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88세대는 1988년 8월 8일을 전후로 버마에서 독재자 네윈에 대한 저항으로 벌어졌던 대규모 민주화시위를 뜻하는 ‘8888혁명’을 겪은 세대를 말한다. 1960년대 중후반에 태어나 현재 40대 초중반인 88세대에는 현재 버마에 수감 중인 민주화운동가 민꼬나잉과 닐라 테인, 코 지미 등이 포함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현재 정치범으로 수감 중이거나 일본, 한국, 유럽 등으로 망명했다. 언론인이나 저술가로 활동하는 경우도 많다. 전문가들은 2007년 학생과 승려들이 무려 19년 만에 버마 옛 수도 양곤 등에서 벌인 대규모 시위 역시 이들 88세대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88세대학생청년’이라는 이름으로 이번 총선에서도 후보를 낸 바 있다. 버마 전문가인 버틸 린트너는 저서 <아웅산 수찌와 버마 군부>에서 “88세대는 세대 집단이지 한꺼번에 탄압할 수 있는 정당이 아니기 때문”에 수치 여사를 잡아가둔 것처럼 일부 지도자를 가둬둔다고 해서 무력화시킬 수 없다고 설명했다. 린트너는 또 “88세대는 확실한 지도부나 조직은 없지만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면서도 “가까운 미래에 그들이 본격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기는 어렵다”는 다소 어두운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한편 인도, 중국 등 버마 주변국들과 미국 등이 버마 민주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국 내에서는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이 적극적으로 버마 군부와 대화를 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오고 있다. 16일 미국 일간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사설을 통해 “미국은 버마가 중국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하기보다는 아시아의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마에서 군부 독재가 시작된 1962년부터 군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은 수치 여사의 연금 해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며 버마가 현재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다. 인도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수치 여사의 가택연금 해제에 대해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자국의 이익을 위해 버마 군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수치 여사는 14일 연설에서 “‘실현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겠습니다’라고 간단하게 약속하는 것으로는 국민들을 한데 합칠 수 없습니다”라며 버마 민주화의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주변국들의 천연자원을 노린 버마 군부에 대한 구애와 버마 군부의 경제 제재 완화에 대한 바람, 그리고 88세대와 시민들의 기대 속에서 수치 여사가 버마 내부에서 얼마만큼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기범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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