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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스페인 출장(2012.06.)

유로존 취재 후기(2012.6.12.~6.21.)

요건 지난 23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공식 취재 후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6222132395&code=970205





스페인 사람들 “재정위기는 우리 잘못이 아니다” 한목소리

ㆍ취재후기-기자가 본 스페인·독일

9박10일 일정의 유로존 위기 취재 과정에서 가장 잘한 일이자 가장 큰 실수였던 것은 출장 첫날, 그러니까 지난 12일 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자마자 철야 취재를 강행한 것이었다. 인천공항에서 12일 오후 2시 비행기를 타고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6시. 7시간의 시차 때문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다시 켠 휴대전화의 시계는 불과 4시간만 지난 것으로 나왔다.

한국시간으로 14일자 신문에 독일 현지분위기를 알리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유럽은 한여름이다. 해가 길다고는 해도, 또 미리 약속을 잡아놓았다고는 해도 이 시간까지 점령 시위대의 농성현장에 시위대가 얼마나 남아있을지 알 수 없었다. 


숙소에 짐을 갖다놓고 곧바로 유럽중앙은행 앞 빌리브란트 광장의 점령 시위대 농성현장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미리 약속한 이들 외에도 점령 시위대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었다. 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현장 도착 1시간여가 지나자 대부분의 시위대는 천막 안으로 들어가거나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날 밤 취재 덕분에 생긴 피로는 이후 일정에 계속 영향을 미치면서 발목을 잡았다. 이들과 대화를 나눈 후 중심가인 프라스가세의 쌀쌀한 밤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일의 젊은 회사원들을 취재한 후 늦은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어간 시간은 13일 오전 1시30분. 한국시간으로는 13일 오전 8시30분이었으니 전날 오후 2시부터 11시간 비행을 한 후 8시간여를 철야로 취재한 셈이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럽중앙은행 앞에 설치된 시위대들의 텐트. 대학생과 직장인, 이주노동자 등으로 구성된 시위대는 자본주의와 유럽 은행들의 행태를 비판하며 밤늦게까지 이곳에서 농성을 벌였다.


14일 신문에는 무사히 독일 현장을 취재한 기사가 게재될 수 있었지만 이날의 피로에다 현지시간 새벽 서너 시(한국시간 오전 10시, 11시)가 되면 어김없이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벨 소리, ‘택배 왔다’ ‘대출 받으라’는 등의 전화들은 프랑크푸르트와 마드리드의 밤을 생지옥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출장기간 내내 유럽 전역은 유로 2012 축구대회로 들뜬 상태였다. 독일과 스페인이 전통의 강호이니만큼 이들 나라 사람들은 자국 대표팀의 승리에 광분하는 모습을 보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14일 마드리드로 떠나기 전날 밤 최대한 취재와 기사 마감을 빨리 마치고 잠자리에 든 보람도 없이 독일 대표팀의 승리에 흥분한 젊은이들은 2002년 한국 젊은이들처럼 경적을 울리고, 노래를 부르며 밤을 지새웠다. ‘유로 2012’는 경제위기에 아랑곳하지 않는 유럽 현지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삿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체력을 바닥나게 하는 위험요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 나라가 구제금융 신청해도
위기감 희박, 시위 자취 감춘 스페인
수백일째 농성 중인 독일 모습과 대조


▲ 그리스 총선 결과에
모든 문제 다 해결된 듯
좌파도 우파도 희망적 논평 쏟아내


“스페인 상황이 급박해졌으니 최대한 빨리 마드리드로 가서 현지 분위기를 취재하라”는 본사의 지시에 황급히 비행기편을 구해 날아간 스페인 현지는 독일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유로 2012에 들뜬 모습이었다. 스페인이 우승후보로 거론되면서 마드리드의 프로축구팀 중 하나인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 산티아고베르나베우 앞에서는 스페인 젊은이들이 대규모 단체 응원을 벌였다. 노천카페와 술집들마다 크고 작은 TV 화면에서 유로 2012 경기가 방영되고 있었고, 스페인 사람들은 선수들의 움직임에 환호했다. 얼굴에는 스페인 국기 모양의 페이스페인팅을 하고, 허리에는 스페인 국기가 둘러져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든 자국의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에 열광하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축구 경기가 끝나고, 스페인 대표팀의 경기가 없는 날에도 스페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제위기에 처해있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라틴아메리카나 스페인 등 국가에서 오후 3시~5시 사이에 낮잠을 자며 휴식하는 시간을 뜻하는 ‘시에스타’에 시내 중심가 상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상점들은 문을 닫고 영업을 하지 않았다. 

또 정부 청사들과 기업들이 밀집해 있는 누에보스 미니스테리오스역 주변의 노천카페들과 음식점들에서는 시에스타를 이용해 맥주나 샹그리아(스페인의 포도주 칵테일) 같은 주류를 마시고 있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 나라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시에스타를 단순히 비판하기는 어렵지만,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하는 나라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관습이었다.

마드리드에서 만난 스페인 사람들은 대부분 이번 재정위기에 대해 “우리들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드러냈다. 이는 인디그나도스(indignados·분노한 사람들) 시위에 참석한 이들은 물론 평범한 직장인들, 동네 과일가게의 점원들 할 것 없이 모두 공통된 인식이었다.

현재의 재정위기를 초래한 책임이 있는 사회당 정치인 역시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사회당 대표 경선에서 알프레도 루발카바 현 대표에게 패배한 호세 카를로스 카르모나 세비야 음대 교수는 15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스페인이 가톨릭 국가이다 보니 스페인 사람들은 종교적인 원죄의식으로 인해 현재의 경제적 어려움이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현재의 경제위기는 전 세계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또 “스페인 사람들은 지난 20년 동안 비교적 잘살고 있었다고 생각해 왔지만 사실 스페인의 생활수준은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낮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스페인 사람들이 경제사정에 비해 노는 시간이 긴 반면 일하는 시간은 짧고, 먹고 즐기는 데만 신경 쓴다고 생각하는 독일인들의 인식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경제위기를 외부에서 보는 시선과 달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은 지난해 미국과 유럽 각국에서 정부와 금융당국을 비판하며 벌어진 점령 시위가 스페인에서는 자취를 감췄다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해 5월15일 벌어진 인디그나도스 시위는 스페인 내부는 물론 국외에도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이들은 최근 주말마다 한번씩 소규모 시위를 진행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지난달 15일에는 1주년을 기념해 스페인 전역에서 20만여명이 집결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스페인 국채 금리가 7%를 넘어설 뻔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최근 스페인이 구제금융을 신청했는데도 16일 저녁 시위에는 불과 2000~3000명만 모였다. 독일 점령 시위대가 경찰과 시 당국의 탄압 속에서도 수백일째 주요 은행들이 집결해 있는 빌리브란트 광장에 천막촌을 마련해 놓고 농성을 벌이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마드리드 중심가에 있는 지하철 ‘솔’역이 삼성전자의 갤럭시노트 신모델 출시에 맞춰 역 이름을 ‘에스타시온 솔 갤럭시노트’로 바꿔 달았다.


현지 취재 중에 딱 한 번 이렇게 낙천적인 스페인 사람들조차도 정말 현재 스페인의 경제상황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는 사례가 될 만한 내용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이 사례는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마드리드 중심가의 거리와 광장들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솔 광장에 있는 지하철 ‘솔’역이 지난달 삼성전자의 갤럭시노트 신모델 출시에 맞춰 역 이름을 ‘에스타시온 솔 갤럭시노트’로 한 달가량 바꿔 표시한 일이 그 사례이다.

당시 스페인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와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경제가 얼마나 어렵기에 지하철역 이름까지 팔아먹느냐’는 등의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스페인의 미래를 걱정하는 글들도 많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솔역의 이름은 곧 원래대로 돌아왔고, 스페인 사람들의 걱정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과연 스페인에 희망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드리드에서 만난 이들과 본 것들을 떠올려 봤다. 마리아노 라호이 정부는 그리스 총선 결과가 나온 18일 공영방송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반복해서 방영해 비판을 받았다. 

스페인의 3대 일간지 중 좌파 성향의 엘파이스와 우파 성향의 ABC는 이날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그리스가 유럽의 숨통을 트이게 하다(Grecia da un respiro a Europa)’라는 희망적인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로 인해 스페인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와 인터넷 게시판에는 엘파이스에 실망한 스페인 사람들의 글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또 사회당의 한 중진은 라호이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현재 사회당이 집권 정당이 아니라 딱히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며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다음 선거에서는 스페인 사람들이 사회당을 다시 선택하지 않을까 싶다”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스페인 사람들의 생각대로 현재의 스페인은 그리스보다는 나은 상황이고, 스페인 정부는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는 모습도 보여왔다. 그러나 자국 내의 일도 아닌 멀리 그리스의 총선 결과만으로 국민들에게 거짓 희망을 주는 정부와 언론,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한 위기가 순식간에 스페인을 덮칠 때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글·사진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입력 : 2012-06-22 21:32:39수정 : 2012-06-22 21:3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