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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째 공전하는 학비지원 … 도쿄 조선중고급학교 르포

글·사진 도쿄 | 조홍민 특파원 dury12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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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선학교 지원은 김정일 지원하는 것” - “일본에 세금내니 무상교육은 당연”

일본 민주당은 지난해 총선 당시 ‘고교 수업료 실질 무상화’를 핵심공약으로 내걸었다. 가정형편에 관계없이 배움의 의지가 있는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이었다. 공립은 학비 전액(연간 7만~8만엔), 사립은 연간 12만엔(저소득층 가구 24만엔)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민주당 총선 핵심공약 불구 공안위장 “주체사상 세뇌”

그러나 모든 고교생을 대상으로 한다는 공약과 달리 조선학교는 무상화 대상에서 제외됐다. 지난 2월 당시 나카이 히로시 국가공안위원장이 “조선학교가 방과후 학생들에게 주체사상 등을 세뇌하고 있다”며 학비 무상화 반대 입장을 밝히면서부터다. 

나카이는 “조선학교의 학비를 무상화할 경우 (이에 해당하는) 총련 자금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달될 것”이라며 “납치를 자행한 국가에 자금을 지출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선학교가 주체사상을 세뇌하고 있다는 구체적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이후 8개월째 조선학교에 대한 학비 지원 문제는 아무런 진전 없이 겉돌고 있다. 

도쿄 조선중고급학교의 고등부 2학년 학생들이 지난 15일 세계사를 배우고 있다.


지난 15일 도쿄 기타구 주조다이에 있는 도쿄 조선중고급학교를 찾았다. 마침 쉬는 시간을 맞아 재잘거리는 아이들은 여느 고등학생들과 다를 바 없었다. 체육복으로 갈아 입고 뛰어나오는 학생들 뒤로 검정 치마저고리 차림의 한 여학생이 서툰 우리말로 “안녕하십니까”라며 인사를 건넨다. 교문 앞까지 기자를 마중나온 신길웅 교장(61)은 “교사(校舍)가 많이 낡았지요”라며 입을 열었다.

1946년 10월에 개교한 학교는 본래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화약창고였다는 게 신 교장의 귀띔이다. 학교 부근엔 아직도 육상자위대의 주둔지가 두 곳이나 있다. 일본 패망 직후인 1945년 이곳에 잔류한 재일동포들이 땅을 임차해 ‘국어강습소’를 연 것이 시초이다. 이듬해 초 당시 20여명의 학생을 모아 초등학원으로 출발한 조선학교는 10월 정식 학교로 문을 열었다. 신 교장에 따르면 현재 일본에는 73곳의 조선학교가 있다. 대학은 1곳(조선대학)이고 고등학교는 10개가 있다. 전체 학생 8300여명 중 고교생은 1900명이다. 도쿄에 있는 고등학교 과정은 이곳뿐이다.

일본 전체에 고교는 10곳뿐… 시골선 교사 월급도 못줄 판

4월에 학기가 시작됐지만 여전히 학생들은 학비 지원 혜택을 받지 못한 채 학교를 다니고 있다. 이곳 고등부의 학비는 연간 45만엔. 공립학교보다는 비싸지만 일본의 사립학교(적게는 70만엔, 비싼 곳은 150만엔)보다는 싸다.

그러나 일본 정부로부터 한 푼도 지원받지 못한다. 학교를 운영해야 하는 입장으로선 무상화 제외 조치가 아쉽기만 하다. 1년 예산 3억엔 가운데 80%는 학생들의 수업료로 충당하고 20%는 기부금과 식당·자판기 수입으로 해결하고 있다. 예산 중 4500만엔은 현재 일본 재무성 소유로 돼 있는 학교 부지 임차료로 나간다. 신 교장은 “그래도 이곳은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 중·고생 합쳐 800여명이 다니고 있는 만큼 수업료가 웬만큼 들어오기 때문이다. 후쿠이나 기후 등 중소 지역의 조선학교는 학생 수가 적어 교사들의 월급이 몇 달씩 밀리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게 신 교장의 설명이다. 일부 지자체에선 보조금을 지급하기도 하지만 일본 정부는 조선학교에 단 1엔도 준 적이 없다.

올들어 무상화 제외 문제와 함께 인권 침해, 학습권 차별 논란이 일면서 일본 내에서도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지난 3월 초엔 고교 무상화 법안을 심의하는 중의원 문부과학위원회(위원장 다나카 마키코) 소속 의원 23명이 학교를 찾았다. 신 교장은 “정규 학교가 아닌 ‘각종학교’로 인가가 나 있는 조선학교에 의원단이 방문한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신길웅 도쿄 조선중고급학교 교장이 지난 15일 교사 앞에서 학교를 소개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4월 들어 조선학교에 대해 “고교에 준하는 과정의 교육을 하고 있는지 외교 루트를 통해 본국(일본)이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상화 제외’를 결정했다. 학습권·인권 침해란 비난이 거세게 제기되자 “검토회의 심사를 거쳐 기준에 충족할 경우 지원할 수도 있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문부과학성은 지난 8월31일 “외교상 배려 등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교육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사실상 조선학교가 심사 기준에 충족됐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같은 기준만 나왔을 뿐 조선학교 무상화 제외 조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문부성은 심사기준 충족 인정, 납치문제 등 정치적인 걸림돌

일본 정부가 무상화 제외 조치를 쉽게 풀지 못하는 것은 ‘납치 문제’에 따른 국민 감정과 여론 때문이다. 여전히 일본의 우익들은 “조선학교를 지원할 경우 납치 문제가 희석된다” “북한의 지원을 받는 학교에 무상화가 웬말이냐”며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반대 이유 중 하나로 각 교실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신 교장은 “정치와 교육을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문제”라며 “우리는 재정적으로 지원을 받긴 하지만 교육과는 별개”라고 주장한다.

일례로 ‘납치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인 납치는 나쁜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반일 교육’ 또한 이곳에선 이뤄지지 않는다. 학생 대부분이 일본에 삶의 터전을 갖고 있는 재일동포 3세와 4세들이며, 졸업 후 일본 사회에 편입돼 살아가기 때문이다. 신 교장은 “여기 다니는 학생들의 부모들은 모두 일본에 세금을 내고 있는 주민들”이라며 일본인이 낸 세금을 조선학교 지원에 써서는 안 된다는 우익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김정일 초상화 떼어내기도… 식민지배 탓에 학교 생긴 것

지난 3월 도쿄 중고급학교 자체 조사결과 한국 국적을 가진 학생 51%, 조선적 48%, 일본 국적 2%로 나타났다. 교육과정은 일본 학교와 거의 같다. 학제도 일본식을 취하고 있다. 다만 국어와 역사 등은 따로 가르친다. 교과서는 조선학교 교사들이 자체적으로 만든다. 신 교장은 “나도 수학 교과서 편찬위원”이라고 말했다.

초상화를 붙여 놓는 데 대해서는 “그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과거 조선학교가 자리잡는 과정에서 북한의 경제적 지원이 큰 힘이 됐다”고 신 교장은 말했다. 

북한은 1957년부터 교육원조비 명목으로 연간 200만달러를 지원했다. 지금 환율로는 약 1억6000만엔 정도 되지만 당시로서는 대학교 한 개 정도를 세울 수 있는 돈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많게는 30억엔의 지원이 들어왔지만 북한의 경제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지난해엔 2억엔에 그쳤다. 초상화는 일종의 ‘감사 표시’란 얘기다. 일부 중학교에선 학부모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초상화를 뗐다고 한다.

그러면서 신 교장은 강조했다. “이 학교는 ‘이북(북한)’의 것이 아닙니다. 재일동포의 학교이고, 조국의 재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학생들이 졸업하면 간첩이 되는 것도 아니에요. 본질을 따지자면 일본의 식민지배 때문에 이곳에 조선학교가 생겼습니다. 일본 정부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